스틸 앨리스: 기억을 잃어가며 스스로를 지켜내는 아름다운 투쟁
1. 영화 스틸 앨리스의 배경과 작품 의도
스틸 앨리스(Still Alice, 2014)는 리사 제노바(Lisa Genova)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리처드 글랫저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가 공동 연출한 작품입니다.
줄리안 무어는 이 영화에서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를 겪는 언어학 교수 앨리스를 연기하며,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는 병을 중심에 두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병을 마주한 인간의 품위와 존재의식**입니다. 치매에 걸린다는 건 단순히 기억을 잃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잃는다는 공포. “나는 기억하는 존재일 때만 나인가?”라는 깊은 질문이 영화 전반을 지배합니다.
2. 줄거리 요약: 점점 희미해지는 자신과의 싸움
앨리스 하울랜드(줄리안 무어)는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재직 중인 저명한 언어학 교수입니다. 남편 존(알렉 볼드윈)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세 자녀들과도 가깝게 지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던 어느 날, 강의 중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나 나이 탓이라 여겼지만, 증상은 점차 심해집니다. 길을 잃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결국 병원을 찾게 됩니다. 진단은 조기 발병형 알츠하이머. 아직 50세 초반의 나이에, 그녀는 점점 모든 것을 잊어가야 하는 운명에 놓입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지식을 이용해 병의 진행을 추적하려 하고, 가족에게 이를 고백합니다. 가족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지만, 특히 막내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와의 관계 변화가 이 영화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합니다.
3. 연출과 분위기: 현실적이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톤
이 영화는 병의 공포를 극대화하거나 감정을 과잉 소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일상적인 풍경, 조용한 대화, 흐릿해지는 시선으로 감정을 조심스럽게 쌓아갑니다.
감독은 자극적인 장면 없이,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삶에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시계처럼 정밀하게 묘사합니다.
가령, 일기장을 넘기다 같은 단어가 반복되어 있는 장면. 휴대폰에 남겨진 메모. 혼자 집을 걷는 동안 점차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표정. 그 모든 것들이 마치 관객이 앨리스가 된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카메라는 종종 그녀의 시점으로 전환되며, 우리가 ‘잊혀진다는 감각’을 체험하게끔 유도합니다.
4. 줄리안 무어의 연기: 인간이 기억을 잃어갈 때 보여줄 수 있는 품위
줄리안 무어는 앨리스를 연기하며 단순한 병든 사람 이상의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존엄을 지키려 하고, 감정 표현을 억제하면서도 존재의 고통을 극복하려 애씁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녀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반복해 말하고, 기억 테스트를 위해 남겨둔 노트북을 켜며 스스로에게 영상을 남기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내가 나를 기억하기 위해 나에게 말하는 절절한 기록’으로 느껴졌습니다.
말이 흐려지고, 단어를 잃고, 사람의 얼굴을 잊게 되는 동안에도, 줄리안 무어는 한 인물이 어떻게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하는지를 깊이 있게 표현합니다.
5. 개인적인 감상: 존재는 기억과 감정을 넘어선다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슬펐던 건, 병의 진행보다도 **앨리스의 존엄을 지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녀는 끝내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합니다. 그 장면은 모든 관객에게 말하는 능력보다도 말하려는 의지의 위대함을 일깨워 줍니다.
영화는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따뜻합니다. 앨리스는 잊혀지면서도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려 하고, 딸 리디아는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이해하며 가까워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영화 말미, 리디아가 책을 읽어주는 장면. “무슨 이야기였는지 알아요?”라는 물음에, 앨리스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 대사는 모든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만은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울림 있는 엔딩이었습니다.
6. 결론: 잊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나’
스틸 앨리스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 자신을 증명하나요?” 기억인가요? 말인가요? 직업인가요?
이 영화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인간은 인간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다루지만, 단순히 질병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와 정체성, 사랑과 상실에 관한 철학적인 탐색입니다. 조용하고도 진실하며,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이야기.
그리고 앨리스는 결국 잊혀지지 않을 인물로, 우리 기억 속에 살아남습니다.